2005년 02월 24일
영화산업의 진정한 위기
언제부터인가 집에서는 영화를 보지 않는다. 영화를 퍽 좋아했지만, 비디오든 동영상 파일이든 가지고는 있어도 보지 않는다. 공부하듯 영화를 보는 습관 때문에,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봐야하는데 두시간을 연속해서 쓰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다가도 중간에 꺼버리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비디오를 빌렸다가 못보고 연체료만 물기를 몇번 한 끝에 요즘은 비디오고 DVD고 대여하지 않은지 좀 오래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오분십분을 항상 알뜰하게 쓰는 사람은 아니라서, 그냥 뭐했는지 모르게 서핑하다가 보내버리는 시간이 두시간이고 세시간이고 늘어지는 일도 종종 있다. 뭔가 오락거리를 찾고 싶을떄면 영화를 보는 대신 만화책을 빌려보는데, 이 만화책이라는 것도 일단 보다가 재미가 붙으면 영화보다 빨리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보다는 만화책이나 인터넷 서핑을 하게 되는 것은 '시간을 보내는 방식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영화라는 것이 대부분 1시간 반 이상의 일정한 물리적 시간동안 네러티브를 통해 시청각을 사로잡는 것임에 비해, 만화는(내가 즐겨보는 옴니버스 식의 만화) 그 연속된 네러티브의 단위가 짧아 사로잡히는 시간도 짧다. 영화는 보다가 중간에 끄고 다른 일을 하다가 다시 와서 보면 재미가 없는 반면, 만화책은 일단 하나의 에피소드가 끝나면 다음 에피소드를 계속 봐야할 이유가 줄어든다. 그 다음, 그 다음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은 개별 작품의 흡인력의 문제이지, 그 속성상 일정한 시간을 투자해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단위를 영화보다 훨씬 짧다. 즉, 시간 활용이 좀 더 자유스럽다.
인터넷의 경우는 더욱 분명히 차이가 난다. 한 싸이트에서 한시간을 보내던 30초안에 나가버리던 그건 100% 유저의 적극적 활동이다. 나는 인터넷에서 5분이 넘는 동영상은 안 본다. 사실 동영상 자체를 거의 보지 않는다. 로딩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설사 버퍼링 타임 제로라고 해도 많이 볼 것 같지는 않다. 동영상이란 자기 마음데로 스킵하고 뛰어넘으며 읽을 수 있는 글과는 달리 그것이 플레이 되는 물리적 시간을 거기에 투자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나의 개인적 시간을 이런식으로 매체에 의해 점유당하는 것이 불편하다.

이것은 '시간의 효율적인 활용'과는 정말 아무런 관련이 없다. 뭔가 바쁘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영화/동영상이라는 형식 자체가 연속된 물리적 시간과 주의를 요구한다는 것이 이제는 부담스러운 것이다.

영화를 보려면 개봉했을때 영화관에 간다. '영화관에 간다'는 하나의 이벤트같은 기분이 없이도 다만 그 영상과 소리를 따라가며 물리적 시간을 바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영화는 사실 아주 드물다. 그래서 나의 하드에는 몇 편의 영화가 있지만, 그 중에 처음부터 끝까지 플레이 된 것은 없다.

아직 나 같은 사람이 많지 않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릴적부터 정보가 '스트리밍'되기를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브라우징'했던 아이들이 크면 뭔가 많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물론 네러티브의 매력이란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가지 재미 중에서 물리적 시간을 요구하는 네러티브들이 차지하는 위상은 지금과는 달라질 것이다.

영화산업의 진정한 위기는 저작권 개념이 해이한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달라지기 시작한 데서 올지도 모른다.
by nowhere | 2005/02/24 02:17 | Pensee | 트랙백(1) | 덧글(9)
Tracked from m i t h r a .. at 2005/02/24 13:10

제목 : 너무 빠른 인터넷. 한겨레의 변화 의지. '광장' ..
1. 예전에 저는 누군가 인터넷이 세상을 망치고 있다느니 하는 글을 적어놓은 걸 보면, "그거야 인터넷이 정보 공유나 의사 전달에 있어서, 효율성과 민주화 같은 순기능으로 세상에 기여할 수 있다는 걸 생각치 못한 당신 편견일 뿐이지"라고 비웃음을 날려주었습니다. 요즘 저는 예전에 제가......more

Commented by 실러캔스 at 2005/02/24 09:14
평소에 제가 느끼던 것이 타인의 글에 이렇게 유사하게 묘사되는 일은 별로 없는데 읽다가 섬칫 해서 덧글까지 남기게 되네요. (초면에 죄송..) 하긴 어쩌면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많을 것도 같습니다. 제가 컴퓨터로 영화를 볼 때 두시간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게 고역이었던 것도, 평소엔 멍하게 살면서도 정작 게임 하나 깨는데 시간투자하기를 꺼려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Commented by nowhere at 2005/02/24 18:09
섬찟 하실꺼 까지야 ㅎㅎㅎ 전 아무래도 점점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 것 같아요.
Commented by 아미 at 2005/02/25 01:09
멋진 글이네요.
ㅋ...전 영화보는 거 좋아하는데...
저도 동영상은 아예 안보지만, 영화랑 동영상은 많이 다르거든요. 영화는 '점유 당하기 위해서' 보는 거니까요.
그 장소를 떠날 수 없이 2시간 연속 보는 것은, 나의 일상에서 벗어나 그 영화의 내러티브에 몰입하기 위한 필수적 의례라고나 할까, 그렇게 멋진 영화 한편 보고 나면 정말 다른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지요. 그렇지만, 인터넷 서핑을 2시간 한다면, 어떠한 카타르시스 작용도 없잖아요.....

Commented by manet at 2005/02/25 01:59
나도 비디오가게 간지는 2년도 넘었어요. 극장도 아주 가끔씩 가곤 하는데. 오늘 이런 생각을 했죠. 갈피를 못잡고 공허하게 시간만 날리는 것이 습관이 되지 않았나. 순간순간이 공허하면 집중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니까.
학창시절엔 오페라 들으며 날밤새곤 했는데, 요즘 같아선 오페라 하나 듣기도 힘들더군요. 브라우징은 집중력과 사고의 적인 듯 해요. 그래서...3월이 되면 죽어라 공연을 다닐 생각이에요. 잘 될지 모르겠지만..요즘 반성중~ ^^
Commented by goodhyun at 2005/02/25 15:21
영화를 QVGA(320x240) 크기로 모니터 구석에 띄워 놓고 다른 걸 보며 허송세월하시는 옵션도 있답니다. ㅡㅡ;;;
대신 모니터가 커야겠죠? (퍽)
Commented by nowhere at 2005/02/25 18:08
아미/ 저도 영화보는거 조아해요. ^^ 근데 뭐랄까, '영화보기' 자체가 일종의 하나의 체험이고 뭔가 주변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이 있는 세트로서 좋은 것이지, 그냥 네러티브를 가진 동영상의 한 장르로서는 아니라는 거죠~
manet/ 반성씩이나. 좋으면서도 '저렴한' 공연있으면 추천해주세요. ㅋㅋ
goodhyun/ 모니커 새로 산지 얼마 안된다구요. ㅡ.ㅜ
Commented at 2005/02/26 13:0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細流 at 2005/02/26 23:02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밸리에서 링크 타고 들어왔어요.
그런데 어쩌면..세상에; 제 마음속에 있는 말을 전부 조목조목 정리해서 해주시는군요. 저도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진득하니 붙잡고 앉아서 보는 게 너무 답답하고 좀이 쑤셔서 집에서 영화는 잘 안 보거든요. 큰맘먹고 사 놓은 DVD들도 안 보고 쌓아두고 있으니..; 왜 그럴까 생각했는데 바로 저런 이유인 것 같아요.;
글 잘 읽었습니다. 슬쩍 링크도 가져갈께요.^^
Commented by 아미 at 2005/02/26 23:50
에비에이터 진짜 좀 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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